시편 84 : 1 ~ 12
1.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4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6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7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누가 복 있는 사람인가
8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
9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2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오늘 시편기자의 모습보며 어디에 시선을 두고 사모하며 사는 것이 중요한지를 본다.
캐나다로 삶의 터전을 이전한 후에 나의 삶에는 시간이 많아졌다.
시간이 단순히 많아졌다고 표현 하기에는 모호 하지만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 나의 개인 시간, 아내와 보낼 수 있는 시간들이 많아졌다. 캐나다에 오기전 하나님께 기도 할 때 이러한 시간들을 한국에서 보낼 수 없기에 갈망했던 시간들을 여기에서 보내고 있다. 물론 학교도 다니고 일도 하지만 나의 삶의 시간 패턴은 오전 8시까지 출근한 후에 오후 4면 퇴근하는 삶을 살고 있다. 한국에서는 상상 할 수 없는 퇴근 시간이다. 반차를 쓰면 2시 30분에 퇴근이지만 업무가 밀려있어서 2시 반에 나가기가 쉽지 않아 4시에 퇴근하는 경우들도 많은데 이곳에서는 특별히 급하게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면 퇴근하라고 독려한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원하는 시간들을 얻었기에 만족과 행복감만 가득 할까?
단순하게 대답해서는 "아니다." 왜 아닐까?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늘었지만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마냥 쉽지는 않기도 하고
나의 개인시간이 늘어서 운동도 하며 몸은 더욱 건강해졌지만 잘 모르겠지만 삶의 만족도가 높아졌다고 표현하기 어렵다.
아니, 삶의 만족도라는 절대 기준이라는 것이 있을까? 사람은 만족 할 수 있는 존재일까?
어딜가나 만족하기란 쉽지 않다. 캐나다에서 시간이 많아지고 아이들과 함께하고 가족과 시간이 많아지면 유토피아가 펼쳐질 줄 좀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이민자의 외로움이 있었고 다시 맺는 관계들은 이전에 내가 맺어 왔던 관계들 처럼 편안하게 마음을 다 나누기는 서로가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물론, 좋은 사람들은 많이 있다.) 또한, 이민자로 영어 울렁증과 신분의 불확실성, 끊임 없는 챌리지들이 우리 앞에 있다. 어디를 가나 어느 곳에 있든지 장점과 단점이 있기 때문에 완벽한 만족이란 있기 쉽지 않다.
그래서 어디에 시선을 두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현재의 삶, 단순히 나의 만족만을 쫓는 삶을 살게 되면 불안정하고 불만족인 삶을 살게 되는 것 같다. 신기하게도 나의 만족, 나의 문제 해결만을 바라보게 되면 만족을 얻어도 불만족이 또 생기고 문제가 해결되어도 다음 문제가 나를 두렵게 한다. 시편기자가 던진 질문을 나에게 던진다. "누가 복있는 사람인가?"
정답은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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